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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사회적이슈

‘프라하의 또순이’ 공부 하러 체코 갔다 민박집 여사장님 된 23살 박아름씨

‘프라하의 또순이’ 공부 하러 체코 갔다 민박집 여사장님 된 23살 박아름씨

‘프라하의 또순이’ 공부 하러 체코 갔다 민박집 여사장님 된 23살 박아름씨

[쿠키 사회] “레슨 마치고 집에 가던 중 길 잃은 한국 여행객 만나 남는 방 묵게 했다 입소문…그렇게 처음 민박 시작했죠.”

그때는 정신없이 빨래와 밥을 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빨래와 40명이 먹을 식사 준비는 쉽지 않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난 민박집 사장이니까. 일에 파묻혀 있을 때 한 여자가 우리집을 방문했다. 체코에 처음 놀러왔단 말에 볼 만한 장소를 추천하고 과일과 술을 내줬다.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게 일상이니까. 그리곤 잊고 있었다.

2006년 8월 한국에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음악공부하러 체코에 갔다는 자식이 민박집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엄마의 확인 전화였다. "네가 민박집을 한다고"란 엄마의 채근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엄마는 체코로 오셨다. 방을 가득 채운 짐들과 여행객을 직접 본 엄마는 아무말도 못했다. 알아서 잘 하란 말을 남기고 사흘 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내가 민박을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했는데…. 비밀이 밝혀진 계기는 단순했다. 소문을 듣고 우리집을 방문했던 한 여자는 기자였다. 그녀가 쓴 글은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엄마는 인터넷을 통해 자식의 모습을 봤다. 정작 난 체코에 있었기에 한국에서의 뜨거운 반응을 몰랐다. 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울리며 일주일 내내 날 괴롭혔던 수백통의 전화로 '폭발적 인기'를 실감했다.

내 이름 박아름. 대구에서 태어나 올해 스물셋인 나를 보고 사람들은 '프라하의 또순이'라고 부른다. 똑똑하고 야무지게 일처리하는 또순이란 말이 싫지는 않다.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까.

민박집은 2006년 3월부터 12월까지 딱 9개월 운영했다.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련은 없었다.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집을 찾았던 게 신나서 시작했던 게 민박집 운영까지 이어졌다. 사실 다시 하라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전 4시 기상에 11시까지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낮 시간동안 연주 연습을 한 뒤 다시 사람을 맞는 강행군은 당시 스물두 살 여학생이 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애초 체코는 민박집을 운영하러 간 게 절대 아니다. 네 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던 나는 체코 프라하 콘서바토리에 유학을 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이전까지 3번정도 체코를 방문하면서 음악 공부를 했던게 인연이 돼 이곳을 찾았다.

문제는 2005년 9월 프라하에 도착하는 날부터 생겼다. 마중 나오기로 했던 교수와 길이 어긋나면서 꼼짝없이 공항에 발이 묶인 신세가 됐다. 연락처는 당황하니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한국에도 어떻게 전화할 지 막막했다. 오후 6시에 도착해 10시가 될 때까지 4시간 내내 울고 있으니 어디선가 귀에 익은 말이 들렸다. 중년의 한국 아주머니가 옆에 와서 왜 우느냐고 물으며 자신이 잡은 숙소로 가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약간은 의심스럽지만 대중교통으로 이동한다는 말과 이미 밤 11시가 넘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우연과 인연이 뒤섞인 프라하 도착 첫날을 민박에서 보내며 이곳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사람들과 비빔밥을 먹으며 어느새 까탈스러웠던 성격이 무뎌져가는 듯 했다. 애초 이틀을 계획했던 민박행은 일주일로 늘었고 그동안 난 프라하에서 지낼 새 보금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프라하의 생활은 한국과 달랐고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4시. 정리를 하고나면 오후 6시 넘기가 일쑤였다. 이방인인 내가 이들의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이곳은 오후 8시만 되면 대부분의 집에 불이 꺼졌다. 연습을 할라치면 어느새 이웃이 방문해 악기를 가리키며 'NO'를 외쳤다. 이런 잔소리를 무시하는 것도 한두번, 결국 주민의 신고에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내 돈 주고 살고 있는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연습을 못한다는 억울함에 오죽하면 화장실에서 연습하겠다는 오기가 생겼을까.

이러던 중 차고가 있는 집을 보고, 연습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일단 주위 눈치를 안 보겠다 싶어 난방이 안 된다는 말을 한 귀로 흘려 듣고 덜컥 계약했다. 야심차게 연습을 하려고 바이올린을 꺼내는 순간 영하 15℃의 프라하 강추위에 손가락이 굳었다. 덕분에 연습하기 전 1시간 동안은 손을 녹여야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눈치 안 보고 맘 편히 실력을 쌓을 수 있던 프라하의 겨울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계약이 끝나자 더 이상 차고는 연습공간이 될 수 없었다. 예전 같은 굴욕은 당하기 싫어 다소 무리를 해 프라하에서 제일 좋은 집을 빌렸다. 발소리가 울리고 혼자 있으면 무서울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연습하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은 한동안 계속됐다.

민박집 여 사장의 기회는 의외의 상황에서 열렸다.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버스를 놓치고 길을 잃고 울고 있는 한국 여자 여행객 3명을 만났다. 그냥 지나치기도 안타깝고, 예전 공항에서 울던 나의 모습이 겹치면서 남는 방에 묵게 했다. 사흘 있기로 했던 그녀들은 열흘정도 머물다가 떠났다. 문제는 그녀들이 유럽전역을 다니며 한국인 여행객에게 프라하 우리집을 '강추'했다는 것. 입소문을 타자 1만명이 넘는 여행객들은 무작정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하나둘 침대를 늘렸던 게 어느새 옆집까지 빌려서 민박집을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냐고 묻는다. 솔직히 돈은 못 벌었다. 버는 대로 집 꾸미고 방문했던 이들에게 돌려줬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프라하 가기 전 틀에 갇혀 있던 마음을 훌훌 털어 버렸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건 소득이다.

어느새 삶의 큰 이정표가 됐던 프라하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프라하에서의 추억은 생생하다. 프라하 우리집을 거쳐간 이들 중 3천명이 넘게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꼬박꼬박 메일을 보내주니까.

프라하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도전을 계획한다. 현재는 온라인 쇼핑몰도 운영하지만 나중에는 내 이름을 단 의류브랜드까지 만들고 싶다. 더불어 체코 요리전문 패밀리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싶다. 욕심이 많은 나를 보고 그럼 음악공부는 언제 하냐고 물을 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년 이맘때 쯤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있을 것 같다.